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

아니야. 우리에게 정부나 법률 같은 게 없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우라스에서도 법률이나 정부가 아이디어를 통제하지는 않았어. 그랬다면 어떻게 오도가 이론을 세웠겠어? 어떻게 오도니안 주의가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겠어? 아키스트들은 힘으로 종지부를 찍으려다 실패했지. 억압해 눌러서 아이디어를 으깰 수는 없어. 무시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지.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하고 있는 짓이 바로 그거란 말이야! 사불은 가능할 때는 널 이용하다가 그게 불가능해지자 출판도, 가르치는 일도, 심지어는 작업까지 못하게 하지. 맞지? 다시 말해 그는 네게 휘두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 힘을 어디서 얻지? 권위를 부여받은 건 아니지. 그런 건 없으니까. 지적으로 탁월해서도 아니야. 그자에겐 지적 탁월함이 없으니. 사불은 평균적인 인간 정신에 내재한 비겁함에서 힘을 얻는 거야. 공공의 견해 말이야! 그게 그가 일부를 이루면서 어떻게 사용할지 아는 권력 구조야. 개인의 정신을 억압함으로써 오도니안 사회를 지배하는. 공인된 적도 없고 용인될 수도 없는 정부.

Ursula K. Le Guin, 이수현 옮김(2002), <빼앗긴 자들>, 서울: 황금가지. 190쪽.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는 두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지구를 은유한 행성인 우라스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혁명을 통해 여기를 벗어나 위성인 아나레스로 이주한 이들이 만든 공유재산에 기초한 아나키즘의 사회가 그것이다.

아나레스에는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고 정부나 법률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다른 형태의 권력이 존재한다. 금지나 처벌과 같은 규제가 아니다. 그 권력의 작동방식은 ‘무시’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국가기구를 통한 억압으로 새로운 변화와 혁명을 억누를 수 있다. 아나키즘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유와 표현을 허용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새롭고 도발적인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변화를 배제한다. 새로움에 대한 무시는 “평균적인 인간 정신에 내재한 비겁함”, 르 귄의 표현을 빌면 “공공의 견해”에 기초한다.

체제의 기초가 사적 소유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곳에서든 공공의 견해,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의견”을 추정하고 이를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모든 타자의 사유와 의견을 하나로 묶어 일관성을 찾아내는 기관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공의 견해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관이나 체제는 어떤 사회든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를 취합하여 보관하고 정리하는 기관 또는 집단이 그렇다.

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방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가공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자격을 갖춘 기관과 집단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공의 견해’가 어디까지인지 한계를 정한다. 이런 한계를 벗어난 사유와 행위는 즉시 무시된다. 억압이 아니라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권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이런 공공의 견해에 대한 판정은 “외부에서 보기에”, “관례적으로”라는 구절로 들려왔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어도, 구체제의 부역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도, 예전과 다르지 않은 무시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르 귄의 말하는 무시하는 권력. 그것은 바로 2017년 한국에서도 존재하는 관료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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