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꿈꾸는 미디어] 신박한 미디어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새정치 part2

● 그러면 미디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 홍보물이 아닌 지역 정치 모임을 위한 과정
*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의 미디어는 대부분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와 성과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
* 정치에 대한 불만이 모이는 공간, 지역에 요구할 정책을 집단지성으로 연구하고 제안할 수 있는 공간 등 사람들이 생활정치의 일환으로 모일 수 있는 매체가 필요
* 포털 사이트와 같은 ‘공공 플랫폼’을 만들어 지역의 중요한 과제, 지자체에 대한 요구, 정보 교류 및 연구 등을 모아낼 수 있는 미디어를 구상하자.

2. 부실한 공약을 점검하고 시민들이 공약을 만들자
* 지방선거에서는 아무도 공약을 보지 않고, 정당이나 후보들도 공약에 신경쓰지 않음.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인맥으로 움직이는 선거에서 공약은 아무 의미가 없고, 행여 시민들이 물어봐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함.
* 지역에 필요한 정책과 과제들을 모아서 시민 공약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 이렇게 만든 공약으로 지방선거 후보들의 공약을 평가하고 문제점을 알리는 미디어가 필요

3. 정당인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가 후보를 미디어로 만들기
* 어쨌든 선거가 ‘후보’ 경쟁이라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자기들만의 후보를 내놓는 방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
* 지역공동체와 시민들이 미디어를 통해 지금의 지역정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시민 후보’를 만들어 정당 경선에 참여토록 하는 미디어.
* 더 구체적인 내용은 기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기록하지 않음.

[동네에서 꿈꾸는 미디어] 신박한 미디어와 함께하는 우리동네 새정치 part1

● 오고간 이야기

1. 지역정치는 이들만의 세상
* 지자체, 공무원, 산하 기관 – 지역구 국회의원, 기초단체 및 광역단체 의원 – 정당 지역위원회 – 시민단체 – 직능/이익단체 – 관변단체 – 토호세력 등.
* 산악회, 체육대회, 향우회 등 비공식적인 접촉과 인맥으로 지역정치를 그들만의 잔치로 만듦.

2. 정치따로, 시민따로
* 중요한 정치 제도는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만들어 진보정당조차 폐쇄적이 됨
* 정작 참여하고 결정해야 할 시민들은 그 밖에 머물며 정치 제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음. 이러니 정치가 왜 중요한지는 알 수 없으며, 그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함.

3. 지역 미디어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 서울도 인구 규모로 본다면 광역시 대여섯 곳이 묶인 지역으로 서울이라는 하나의 지역으로 볼 수 없음.
* 지역신문, 지역방송 모두 정치인들의 대변인이이거나 이들만을 독자(시청자)로 삼는 매체들. 지역 시민들은 결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들의 보도가 지역정치를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만든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만을 중요하게 생각함.

 

네이버 뉴스조작사태 – 뜬금없는 알고리즘 타령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딱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최근 네이버에서 뉴스 배열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이 밝혀져 문제가 되고 있다. 국회에 출석한 이해진 창업주는 알고리즘 공개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공개해서 검증받는 것에 찬성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에는 뉴스배열 알고리즘이 무슨 사해문서나 되는냥 공개 어쩌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적은 견해임을 밝히며, 이 부분에 대해 잡설 하나 투척해 본다.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사태의 본질

사태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네이버 스포츠의 한 담당자가 축구협회의 청탁을 받고 축구협회에 비판적인 기사들을 노출되지 않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  이걸두고 사람들의 미심쩍은 의심에 불을 붙였고, 그에 대한 공격으로 알고리즘 공개에 대한 카드를 꺼내놓은 것이다.

뉴스는 어떻게 배열되는가?

사실 필자가 포털사에 근무하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포털의 뉴스는 사람이 수작업으로 배치했다. 다음의 경우 당시 제주도의 디지털미디어센터(다음본사가 이전하기 전이니 오래되긴 했다)에서 뉴스편집인력이 별도로 편집을 진행했다.

네이버의 기사배열 원칙

그러나 최근 포털사이트들은 알고리즘을 도입하여 뉴스배열에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클러스터링같은 일종의 군집분석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이슈별, 상황별등 맥락이나 연령, 성별등 인구통계학적 특성에 따른 선호로 뉴스를 묶어 자동으로 배열하는 식이다. 일종의 스팸필터링 및 어뷰징 방지 기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에디터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보조적인 역할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에디터의 손에 의해 뉴스의 최종 배열이 결정된다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물론 모바일의경우 연령, 성별 속성들을 위해 개인화된 배열을 자동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포털사이트가 이런 알고리즘을 도입하는 이유는 업무효율성 측면도 있지만, 최대한 뉴스배열을 기계적으로 자동화하여 시시비비를 피하려는 속셈이 더 커 보인다. 어차피 인건비 때려박는게, 자동화를 도입하는것보다 더 싸게 먹히는게 헬조선이 현실이다.

하여 금번 사태를 빌미로 포털사이트의 뉴스배열 알고리즘을 까봐라는 압박을 주는 것이야 말로, 포털을 길들이기 위한 최적의 방안처럼 보인다.

알고리즘은 중요한게 아니다.

이해진 창업자에게 네이버의 검색 알고리즘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절대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딥러닝 라이브러리 공개가 유행이다 보니, 일부 똥오줌 못가리는 국회의원은 그거나 이거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다르다. (어디 기업이 아무것도 돈 안될 것을 공짜로 베푸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누구나 핵심 서비스의 알고리즘은 공개하지 않는다. 구글이 검색알고리즘을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페이스북이 뉴스피드 알고리즘을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네이버 뉴스는 핵심서비스가 아니란 말이냐?

 

답은 그렇다 이다.

네이버는 국내 매출 비중이 67%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은 광고 수입이고 막강한 검색 점유율을 봤을때 디스플레이 광고보다는 검색광고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를 모바일과  PC로 나누면?? 뉴스란 디스플레이 광고중에서 섹션광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전체 매출 비중을 보자면 미미할 것이 분명하다. 뉴스배열 알고리즘 공개로 서비스가 망가져도 생각보다 손해는 적다는 이야기다. (주로 망가지는 쪽은  PC쪽일 것이고, 모바일은 개인화 어쩌고이므로, 큰 영향은 없을 거다)

게다가 네이버는 검색의 최강자 자리에서 뉴스 배열에 대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트레픽 감소를 감내하면서 까지 뉴스스텐드를 전격 도입했던 전력이 있다.

이후 네이버의 행보에 소설을 써보자면

사실 알고리즘을 깐다는 건 어뷰징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뷰징 대상들이 국내 언론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막상 알고리즘을 깠더니 언론사의 어뷰징 기사가 넘치는 아주 황당한 네이버 뉴스가 된다. 이 경우 네이버는 알고리즘 개편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아니 아주 극단적으로 중국의 터우타우와 같이 완전한 개인화 알고리즘을 도입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대박난 개인화 추천 뉴스앱, 터우타오

터우타우가 파괴적인건, 뉴스와 1인 미디어등 매체의 경계를 넘어 개인에게 의미있는 정보를 추천해 준다는 점이다.

자연히 뉴스를 만들면 포털등 어딘가 실린 데가 있던 국내언론사들에게는 당황스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언론사들과 제휴라고는 하나, 네이버는 모바일 탭 부분을 별도의 컨텐츠로 채우고 있고, 모바일에서는 이 채널과 뉴스가 같은 레벨의 서비스로 제공되고 있다.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게 된다면, 뉴스와 채널데이터를 모두 개인화하여 제공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 추천 알고리즘  airs도 베타 중이니, 안정화되면 전면도입을 추진할 수도 있다.

네이버 뉴스추천 서비스 airs

결론적으로 – 네이버를 작살내려면 검색알고리즘을 까자고 하자

결국 이 문제는 알고리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손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회사든, 조직이든, 개인이든 도적적 헤이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약간 논리비약해서 이야기하자만,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입장에서는 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려면 사람손을 배제하는게 최선의선택이다.

네이버를 위해 편을 조금 들어주자면, 내 기억에서는 모든 포털들이 검색에 투자를 줄이고, 서비스를 버리려 할때 끈질기게 검색으로 버틴 회사가 네이버다. 한글 온라인 문서가 턱없이 부족할때 그걸 채우는 서비스를 만든 것도 네이버다. 회사가 성장하는데는 이유가 있고, 지금의 위치에 올라선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네이버를 엿먹이고 싶다면, 그냥 검색알고리즘 까라고 압박해라…

알파고 제로가 세상을 바꾼다?

최근 인공지능에 관한 핫한 뉴스가 떴다. 이른바 “알파고 제로”에 관한 내용이다.

단 몇시간만에 이세돌 9단과 대국을 벌였던 알파고 리를 100% 승률로 격파하고, 커제 9단과 대국했던 알파고 마스터와는 90%의 승률로 격파했다. 여타의 딥러닝 방식과는 다르게, 알파고 제로는 “제로”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아무런 학습데이터를 주지 않고, 스스로 바둑의 룰을 깨우쳤다.

혹자는 이를 보고, 인간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사고하는 최초의 인공지능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혹자는 터미네이터와 같은 파괴적 인공지능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때아닌 공포심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니면 상당수 많은 일들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사회가 곧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IT 에서 밥먹는 사람으로, 이 알파고 제로에 대해 간단히 썰 한번 풀고자 한다.

알파고의 실체

알파고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알파고 작동의 3대 원리랄까? 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가장 핵심은 1)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2) CNN 3) 강화학습이다.

먼저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은 난수의 값을 이용하여 함수를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값이다. 알파고의 경우는 둬야 할 점에 대해 이길 확률이 전부 확률적으로 계산된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CNN은 쉽게 이미지를 인식하는 딥러닝의 방법중 하나이다. 이미지의 인코딩 형태를 매트릭스로 받아, 이를 통해 각 매트릭스의 확률로 부터 이미지를 패턴을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강화학습이다. 어떤 환경에서 정의된 에이전트들이 가장 보상 확률이 높은 행동이나 순서를 선택한다.

즉 바둑판이라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그리고 모든 수에 대한 이길 확률이 계산되며, 가장 확률이 높은 점을 선택한다가 알파고가 하는 일이다. 세부적으로 정책을 정하고 행마를 정하는 각각의 알고리즘이 있긴 하지만, 단순화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파고 제로의 경우는 이 강화학습의 최종판에 해당할 것이다. 혹은 최신 알고리즘인 GAN이 사용되었을 수도 있겠다.

어떤 하드웨어를 장착했는가?

tpu 2.0

알파고는 이런 세가지 원리 아래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받고 있다. 특히 병렬분산처리가 가능하도록 GPU를 이용하는 것은 계산의 효율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알파고 리의 경우 48개의 유닛이 동원되었으나, 알파고 제로에는 4개만이 지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구글은 이미 지난 5월 제 2세대 TPU(tensorflow processing unit)을 발표한 바 있다. 보통의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별도의 유닛이 아닌 기존 CPU와 GPU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전용 머신이 있는 셈이다.

TPU 2.0이 나온김에 하는 말이지만, 알파고 마스터는 1개의 TPU를 알파고 제로는 4개의 TPU를 장착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일반적인 딥러닝보다 새로운 버전의 강화학습은 학습에 필요한 하드웨어 자원을 더 소모한다.

TPU가 궁금하신 분들은 일반 사람들도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에 TPU 유닛이 들어간 인스턴스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도전해 볼 만 하다.

그래서 알파고 제로는 사람은 넘어선 것인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알파고 제로는 두 가지의 성과물이다. 첫째 강화학습 알고리즘이 발전했다는 것과, 둘째, 알고리즘을 최적화 하기 위한 전용 유닛의 사용이다. 알파고 마스터보다 4배가 많은 TPU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알파고 제로의 연산이 더 복잡하고 어렵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또한 언급했다시피, 알파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확률적으로 가장 좋은 값이나,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다. 즉, 목적이 정확하지 않으면 이들은 연산을 할 수 없다. 바둑의 룰은 돌아가며 한수 한수를 두는 것이고, 최종적으로 돌로 둘러싼 빈 칸의 개수가 더 많을 경우 승리라는 보상이 주어져 있다. 룰 베이스로 강화학습을 시킨다면 어느 정도 결과가 예측될 수 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사 사는 것이 이렇듯 결과가 뚜렸한 일만 있겠느냔 말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애매하고, 뭔가 확실한 목적이 없는 일들이 더 많다. 상당수 확률에 따라 최선의 선택이 필요한 일들은 이런 인공지능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을 모두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읽을 만한 소설이,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

확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일들이, 도적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아닐수도 있ㄷ.

오히려 확률적으로 가장 적합한 선택을 회피해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물론, 알파고의 등장으로 세상은 변할 것이다. 확률적으로…

다만, 우리의 일들에 인공지능은 깊게 개입될 것이고, 이전에 전문적인 일들이 전혀 전문적인 일이 아니게 되거나, 오히려 이전에는 비전문적이었으나 오히려 전문적이 되는 일들이 생길지도…….

그러나 알파고 제로는 터미네이터가 될 수 없고, 우리의 일을 한꺼번에 대체하지도 않는다.

로보틱스와 결합하기에는 더 많은 기술적 난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이 몇년안에 바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괄목할 성과이긴 하지만, 공포나 걱정보다는 “비확률”의 세계를 좀더 고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인듯 인간아닌 닝겐 같은 너

큰일입니다!
방송 주제가 sf에 등장하는 “인간 비스무리한 존재”들을 고찰하는 것으로 바뀐 건. 블레이드러너 2049 개봉에 맞춰 밥숟가락 얹어보자는 아재들의 얄팍한 술수라고 치더라도 말이죠.
주제가 방대하니 역시 버릇은 감출수 없습니다. 온갖 아무말이 난무하는 아무말 대잔치로 흘러갑니다.
등록금, 삥뜯기, 자본의 노예, 바느질, 군대, 남자는 기술…..
키워드의 나열만으로고 정신이 혼미한데, 어느 순간 “방송이 장난이냐” “묻자” “묻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사전적 고찰을 해보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갈이 난무합니다.
그 와중에 서로 재미있다며 신나게 떠들어 대는 아재들…..

녹음이 끝난 후 “우린 역시 아무말 대잔치가 적성에 맞는가봐”라는 자아성찰의 시간까지…..

데스노트의 키라의 대사로 이 녹음을 요약할수 있겠네요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PS. 뭐 아시는 분들은 뻔히 알겠지만, 아재들의 연령대를 짐작할 수 있는 키워드들이 숨어 있습니다. 아재들의 연령대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감사의 “마음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셜록 홈즈를 좋아하시나요?

이제는 조금 시들해 졌지만 최근까지 이른바 ‘미드’ 중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장르는 단연 추리물이었다. 두 편의 스핀오프를 탄생시킨 <CSI: Las Vegas>를 시작으로 <NCIS>, <성범죄수사대: SVU>, <크리미널 마인드> 등이 시즌을 거듭하며 인기를 끌었고, 의학을 소재로 하면서도 추리물의 형식을 띤 <하우스> 역시 상당한 고정팬들을 확보했다. 이런 추리물의 기원은추리소설이지만, 영화, 드라마 등 더 많은 대중문화 장르로 눈을 돌려보면 추리물은 다양한 “범죄물”로 각색되고 확장되어 왔다. 범죄소설 장르가 대중문화 역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서양의 경우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당시 세계 도처에서 주둔 중이던 미군들을 위해 미국의 출판사들은 저가의 대량 출판용으로 염가본(paperback)이나 문고판(pocketbook)을 내놓았다. 전시용이기는 했지만 이런 출판방식과 유통경로는 미국 국내의 시장 규모에 미군 주둔지 인근 시장이 또한 가세함으로써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한국에서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였다.

미스터리로서의 자본주의

하지만 범죄소설의 인기를 이런 출판시장의 변화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인류의 두 차례 자살기도”라고 평가받는 양차 대전 사이에 터졌던 1929년 대공황이 대중들에게 가져온 심리적 충격은 상당했다. 주식시장의 폭락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유발된 가공할 인플레이션과 연이은 실업자들의 행렬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지 알려주었다. 대공황에이어서 발발한 세계대전은 대중들에게 자본주의를 교과서에서 나오는 수요/공급 법칙과 같은이념이 아닌, 삶의 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원인을 이해하기 힘든 대공황, 그리고 적군/아군, 선/악의 구분조차 혼란스럽게 만든 전쟁이란 대중들에게는 목숨을 건 모험이자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미스터리였던 셈이다. 이런 심리적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일상의 문화에서 찾으려 했던 돌파구 중 하나가 바로 범죄소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대공황과 전쟁은 극히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삶의 방식이 그 본질을 드러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화폐와 교환되는 임금노동과 철저한 시공간상의 분업화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의 확대란,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보이지 않은 촘촘한 사회적 관계의 망에 놓여짐을 뜻한다. 게다가 그 사회적 관계는 화폐와 상품 같은 물건들에 의해 맺어지기 때문에 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그 범인을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와도 같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범죄소설은 작가와 대중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대 자본의 축적방식과 그 활동 반경을 어느 정도 반영하게 된다. 물론 이런 반영에는 범죄소설이 다양한 대중문화의 범죄물로 확대될 때, 그 내용 뿐 아니라 독자와 작가들 모두의 변화 또한 포함하게 된다.

합리적 개인의 추리력: 셜록 홈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탐정인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탄생된 시기는 비교적 범죄소설의 초창기라 볼 수 있다. 대개 문학평론가들은 최초의 탐정으로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의 소설 <모르그가의 살인>에 등장한 뒤팽(Auguste Dupin)을 꼽는다. 한 정치경제학자의 구분에 따르면 뒤팽과 셜록 홈즈의 활동 배경이 되었던 시대는 “경쟁 자본주의의 시기”였다. 대략 18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로 구분되는 이때는 지금과 달리 주로 실이나 옷감과 같은 소비재 부문에 임노동과 기계가 사용되었다. 이런 까닭에 자본가들은 막대한 투자없이 비교적 소규모 자본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고, 시장 독과점이란 불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자본주의의 영원한 이상향인 합리적 개인의 올바른 판단이 사회 전체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합리성, 따라서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완전경쟁에의 믿음이 만연했던 시기였던 것이다.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계획하고 수행하는 개인”에 대한 소망은 바로 뒤팽이나 홈즈의 캐릭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초창기 탐정의 무기란 오직 추리능력, 그것도 증거에 입각한 귀납적(deductive) 추론 방식 뿐 이었다. 에드가 앨런 포는 탐정의 자격으로 분석력과 그에 동반되는 상상력을 거론했고, 홈즈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Conan Doyle)은 시리즈 곳곳에서 증거에 입각한 가설 수립과 그것의 검증 과정이라는 추리론을 설파했다. 이런 합리성에 대한 강조는 다시 홈즈와 뒤팽 같이 사건을 해결하는 한 개인, 즉 완전경쟁의 행위자로서 조직이나 기업이 아닌 자본가 개인에 대한 숭앙을 반영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탐정들의 활동 반경이 당시 경쟁 자본주의 시장의 범위와 겹쳐졌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탐정인 뒤팽은 “모더니티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런던 시민인 홈즈 또한 가장 멀리 간 곳은 그의 숙적인 모리어티 교수와 폭포에서 함께 몸을 던졌던 스위스였다. 당대에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 범위가 유럽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탐정의 활동범위는 바로 자본의 활동 범위였던 셈이다.

추리력을 누른 조직과 기술의 힘

혈혈단신 오직 합리적 추리력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초기 탐정의 캐릭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범죄물은 단연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1953년 <카지노 로얄>로 데뷔시킨 007 시리즈였다. 007의 제임스 본드는 사건의 해결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홈즈나 뒤팽과 같은 원조들과 분명히 달랐다. 그는 논리정연하고 빈틈없는 추리력보다 MI6와 같은 국제적 기관의 기술적 지원을 받는 전형적인 “행동파”였다. 사건이 없을 때는 아편에 빠져있던 홈즈나 칩거와 산책만을 반복했던 뒤팽 같이 초창기 탐정들이 “백수”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제임스 본드는 정보국 요원이라는 전문직이었으며 민첩함, 성적 매력, 호화로운 삶, 그리고 신체적 완벽함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새로운 탐정의 유형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탐정들이 보여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바로 활동 반경에 있다. 은밀하지만 거대한 국가 조직과 자본, 그리고 기술력에 바탕을 둔 제임스 본드는 유럽만이 활동 무대였던 원조 탐정들과 달리 일본까지 진출할 정도로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았으며, 급기야 <문레이커>에서는 달까지 그 활동반경을 넓혔다. 1950년대 이후의 모든 범죄물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제임스 본드의 아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로 창조된 새로운 탐정의 유형들 역시 초창기 탐정들이 경쟁 자본주의의 특성과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반영했듯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제임스 본드라는 요원의 능력이 개인의 추리력이 아니라 조직과 기술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경쟁 자본주의와 비교되는 1950년대 이후 포드주의의 특징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당시는 자본주의 초창기와 달리 거의 모든 산업 부문에 자동화 기계가 도입된 때였다. 이는 합리적 경제행위를 계획하고 수행하는 개인들 사이의 완전경쟁이라는 믿음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뜻했다. 과거와 달리 자본가 개인이 아니라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라는 조직이 자본주의의 주체가 되었으며, 이는 국가를 넘나드는 다국적 기업의 출현으로 본격화되었다. 자본의 이런 변화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새로운 탐정 유형에 영향을 미쳤다. 자본가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보다 기업으로서의 자본이 갖춘 조직과 기술력에 대한 숭앙은 곧 탐정들로 하여금 사유보다 행위로, 그것도 조직과 기술력이 뒷받침된 전문적인 행위를 주된 무기로 삼게 했다. 여기에 다국적 기업의 형태를 갖춘 자본의 전 세계적 활동무대가 범죄물의 무대로 옮겨온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탐정을 향한 욕망, 범죄를 향한 공포

이 시기 범죄물의 변화는 자본의 변화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자본의 변화란 곧 그 자본을 창출하는 임노동자들의 변화를 또한 의미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컨베이어벨트로 대표되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도입과 함께 이뤄진 화이트 컬러, 즉 전문직들의 대거 등장이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과는 조금 달랐다.
도서관 사서, 교사, 카피라이터 등 이전까지는 독립 자영업자에 가까웠던 이들이 이 시기엔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 즉 임노동자 계급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더욱이 전문직하면 떠오르는 ‘정신노동’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이들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루한 일상 업무를 맡게 되었다. 지루한 노동으로의 변화는 전문직들로 하여금 범죄물에 등장하는 ‘전문직’ 탐정에서 자신들의 업무에 대한 자부심을 찾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현실에서의 도피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범죄물에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전문 지식이 도입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제임스 본드가 보여준 능란한 신무기 사용 기술은 로빈 쿡(Robin Cook)의 스릴러물에 등장하는 의학 지식,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에서의 자동차 전문기술, 나아가 초창기 탐정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스터 키튼>에서의 고고학 지식으로까지 전문직의 계보로 이어졌다. 지루한 노동이 주는 박탈감을 당대의 독자들이 범죄물 속 탐정의 전문지식에서 해결하려 했다면, 더 이상 합리적 사유가 필요 없는 반복된 행위에 대한 염증은 범죄물 속 범죄의 동기나 배경으로 투영되었다. 개인의 합리성이 사라지고 행위만이 강조되는 범죄물에서 범죄의 동기 역시 우발적이거나 그 대상이 불특정한 ‘묻지마’ 살인, 그리고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이코 패스’로 설정된 것이다. 범죄물의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이후의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탐정과 범죄의 유형이 창출된 배경에는 이렇게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있다. 노동자 대중들의 자본에 대한 무의식적인 숭앙, 그럼에도 전문직으로서 느끼는 노동과정 속에서의 박탈감, 그리고 그런 박탈감을 잊게 해줄 욕망이 서로 겹쳐진 결과가 바로 범죄물의 부흥을 낳았던 셈이다.

홈즈와 테크놀로지의 만남, CSI

정확한 시기 구분은 힘들지만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던 탐정물에 다시 한 번 변화가 온 시기는 199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00년부터 방송되었고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미드 <CSI: Las Vegas>를 보자. 이 범죄물에서는 이전 시기와 달리 특정한 개인이 탐정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그리섬 반장을 중심으로 하는 법의학팀이 그 역할을 맡으며 사건 현장의 미세한 정보까지 채취하고 분석할 수 있는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바로 이들의 무기가 된다. <CSI> 이후의 다른 범죄물 시리즈들도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서 유사한 캐릭터와 범죄 해결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최근의 범죄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팀장을 맡은 이들이 발휘하는 초창기 탐정, 즉 셜록 홈즈와 같은 치밀한 추리력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홈즈와 같이 확대경 하나만 들고 다니지는 않으며, 제임스 본드처럼 놀라운 신기술로 무장한 무기를 휘두르는 행위로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최근의 범죄물에서는 두 유형의 탐정들이 가진 특징들이 결합되고 있다. <CSI>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이들은 합리적 추리력, 가설을 세우고 증거물로 검증하는 추론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초창기 탐정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런 추리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에 또한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개인이 아닌 팀이 전면에 나선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 노동과정이 겪은 중요한 변화, 즉 위계적 노동조직의 질서가 아닌 업무별로 분화된 팀제가 노동자 대중에게 일상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앞선 두 유형의 탐정이 각각 경쟁 자본주의와 포드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달라진 축적방식을 반영했듯이, <CSI>로 대표되는 범죄물에서도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노동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셜록 홈즈를 향한 향수

범죄물이 오랫동안 대중문화에서 누려온 지속적인 인기는 단순히 독자들의 감성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작가와 감독, 그리고 독자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주된 삶의 방식, 즉 자본주의가 그 형태를 달리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이를 반영하고 투영해 왔다.
특히 노동자 대중은 때론 자신이 되고 싶은 자본가의 모습을 탐정에 투영하거나, 달라진 노동과정에서의 박탈감을 되찾으려 하기도 했고, 일상의 노동과정에서 느낀 지겨움을 범죄의 배경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대중문화의 특정한 장르가 불러오는 유행의 원인은 그래서 그 텍스트안에만 있지는 않다. 그 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 삶의 방식을, 즉 그 속에서 누구나 느끼는 불안과 욕망, 그리고 희망을 꼼꼼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0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탐정의 대명사로 셜록 홈즈가 부동의 지위를 누리는 까닭은 어쩌면 이런 점에 있을 지도 모른다. 독점자본이 아직 굳건해지기 이전, 개인의 능력과 이성이 아직 자본력과 기술력에 억눌리지 않던 시절, 그리하여 완전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그것이다. 행여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꿈꾸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이런 향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게다가 오늘날 어느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환상에 가까운 시절에 대한 향수이며 그렇기에 근 100여 년간을 이어온 자본주의의 부단한 변화에대한 지겨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직도 셜록 홈즈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Who’s afraid of Frankenstein? (3)

 

3.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대중문화

언젠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를 가리켜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그러나 모든 것일 수밖에 없는 존재(I’m nothing, but I must be everything)”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독일 혁명의 유일한 주체로 당시 형성 중이었던 프롤레타리아를 지목한 것은 오직 그들만이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부정할 수 있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는 역사이자, 동시에 노동자라는 계급을 부정하려는 모순된 역사에 다름 아니다.

흥미롭게도 원작에서 ‘괴물’은 바로 이런 정체성의 부정을 시도한다. 괴물은 탄생 직후 자신의 흉측한 외모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여겨지는지 뼈져리게 경험한다. 괴물이 외딴 시골집의 창고에서 혼자 언어를 배우고 글을 익혀 <실락원>, <플루타크 영웅전> 그리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광경은 차라리 애처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꿈꾸던 괴물이 유일한 친구라 여겼던 이들에게 내쫓긴 순간. 그는 자신의 창조자가 속한 족속 전체를 절멸시키리라 다짐하는 ‘괴물’의 정체성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셜리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20세기 대중문화 속 수많은 변종과 아종에서 이렇게 갇혀진 정체성만으로 재현되어 왔다. 당연히 이 재현의 핵심은 바로 괴물의 ‘외모’를 얼마나 끔찍하게 그려내는가에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바로 자신들이 공포스런 존재임을 잊게 하는데 이러한 시각적 재현이야 말로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시작된 헐리우드의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흥행은 바로 이런 전도의 시작이 아닐런지. 이 때 괴물은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창조자의 이름을 얻고, 자신의 역사적 분신인 노동자 대중들에게 하나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이상 노동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아니며, 자신들이 19세기에 부르주아들을 떨게 만들었던 바로 그 공포였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원작 속 괴물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보여짐’(시각적 이미지)은 1930년대 이후 영상매체에서 현실이 되었다. 셜리가 기대했던 작품 전체의 구성이 주는 공포는 이제 단순한 몇 컷의 시각적 공포로 대체되었다. 어디선가 아도르노(Th. Adorno)가 ‘부분에 의한 전체성의 전복’이라고 통탄했던 ‘문화산업’의 악몽은 이렇게 나타났다.

1818년 이후 <프랑켄슈타인>이 거쳐온 변형과 전유의 역사는 하나의 부르주아 장르가 노동자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로 이입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서 느낀 공포는 이제 작가인 셜리의 몫일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의 한 소녀가 쓴 공포소설은 그 자체로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난 180여년 동안 <프랑켄슈타인>은 대중문화 속에서 스스로 언어를 익히고 모습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프랑켄슈타인은 소설 속 자신을 만든 박사와 소설을 쓴 작가의 존재마저 잊혀지게 만들었다. 자신을 만든 주체를 잊게 하고 그 주체를 지배하는 상품의 속성이 오늘날 대중문화의 성격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더욱 강력한 대중문화의 힘은 자신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대중들의 힘을 표상 뒤에 감추고 전도시키는 과정에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부르주아의 공포가 노동자들의 힘이었다면, 노동자들에게 프랑켄슈타인은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괴물을 보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해야 할 이들은 흥행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다. 만일 우리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면, 누가 프랑켄슈타인을 두려워할 것인가.

Mary Shelley(1818/2003),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London: Penguin Books.

Hindle, M(2003), “Introduction” in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London: Penguin Books.

Moretti, Franco(1983), ‘Dialectic of Fear’, in Signs Taken for Wonders, London: Verso Editions and NLB.

Marcuse, H(1960), Reason and Revolution: Hegel and the Rise of Social Theory, Boston: Beacon Press.

Who’s afraid of Frankenstein? (2)

<1866년 영국의 한 카툰>

 

2. 19세기의 프랑켄슈타인: 노동자 대중이라는 괴물

작품에 나타난 박사와 괴물의 관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중 모레티(Franco Moretti)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 관계를 19세기 영국의 계급관계, 즉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로 해석한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노동자 대중)은 자본가들에게 ‘괴물(monster)’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동시대의 엥겔스(F. Engels)가 <영국노동계급의 처지>에서 묘사했듯이 그들은 돼지와 함께 잠을 자고 한 벌의 옷으로 겨울을 나는 처참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파업을 방해하는 자본가와 어용 노동자들에게 염산 테러까지도 불사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셜리의 작품이 발표되고 오래지 않아 영국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모든 민주적, 진보적 요구의 주체들을 “역겨운 폭도들(revolting mobs)”로 몰아세운다. 이 때 그들에게 사용된 은유(metaphor)가 바로 “영혼 없는 육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Frakenstein monster)”이었다.

모레티가 지적한 이런 은유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원작의 또 다른 부르주아적 전유라면, 여기서의 대립은 단지 외면적인 대립, 계급 갈등의 표면적인 투영에 그치고 만다. 도리어 작품 속 박사와 괴물의 적대는 더욱 복잡하다. 괴물을 만든 직후 사라진 박사의 가장 큰 죄악은 사실 자신이 만든 창조물의 존재를 망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2미터 40센티에 달하는 거구에 끔찍한 외모를 가진 그 괴물은 그 탄생의 순간에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을 뿐이다. 자신의 눈에 맺히는 상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것을 가리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복잡한 소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 ‘괴물’이 이후의 끔찍한 고독과 배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게 되었을 때 박사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다. 괴물은 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창조자인 바로 당신이 나를 끔찍히도 미워하고 멸시했소. 당신의 피조물인 나를 말이오. 당신과 나를 얽어맨 이 속박은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만 풀릴 것이오.”(102)
이런 분노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의 적대로 읽어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에서 괴물은 박사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결국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음을 고백한다. 결국 박사와 괴물의 적대는 하나의 소멸이 다른 하나의 소멸로 이어지는 내적으로 연관된 적대이다. 자본은 임노동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임노동의 소멸은 자본의 소멸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작가인 셜리의 의도와 부합할리는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불러내어 마주한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부르주아들의 공포, 곧 램프 속 요정을 불러내고 느끼는 두려움. 바로 그것이다.

과학의 정점에서 불러낸 괴물과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생산력인 임노동은 박사와 부르주아 모두에게 두려움의 존재들이다. 19세기 에드가 알런 포(E. A. Poe)가 소설에서 그려낸 군중에 대한 두려움(군중 속의 남자)은 바로 이런 부르주아적 공포의 또 다른 표현이다. 비록 그녀의 부모가 급진적 사상가들이었다고 해도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셜리 역시 이런 부르주아적 공포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레티가 프랑켄슈타인을 가리켜 “부르주아 문명화가 낳은 공포(the fear of bourgeois civilization)”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공포를 느끼는 주체가 박사와 작가임에도 정작 그 공포의 현실적 실체인 노동자들 또한 이런 공포에 동참해 왔다는 사실이다. 대중문화가 부르주아적인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전도의 과정에 있다. 부르주아의 공포에 그 공포의 현실적 대상을 동참케 하는 것.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 되고 20세기에 와선 아예 희화화되어 버린 이 역사적 과정이 20세기 대중문화의 전형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Who’s afraid of Frankenstein?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Theodore Von Holst
Frontispiece to Mary Shelley, Frankenstein published by Colburn and Bentley, London 1831

 

1.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다.

메리 셜리(M. Shelly)는 자신이 쓴 작품과 그 주인공의 유명세로 그녀의 존재가 잊혀져 온 불행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 뿐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존재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지나치기 쉬운 사실 하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monster)을 만든 박사(Vitor Frankenstein)의 이름이지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셜리의 원작에서 괴물은 피조물(creature), 악마(devil) 등으로 불릴 뿐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그 괴물은 자신을 만들어 낸 창조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원수의 이름으로 불린다고 생각해 보라.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원작 텍스트에 쓰여진 것보다 대중문화의 역사가 만들어낸 이런 전도(inverstion) 속에서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텍스트 외부에서 벌어진 이런 전도는 이미 그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박사는 자신의 괴물이 생명을 얻던 바로 그 순간, 공포에 휩싸여 실험실을 박차고 나온다. 자신의 놀라운 지적 산물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모습은 주체의 활동과 그 결과가 분리되고, 서로가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소외’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그 산물인 상품과 대립하고 상품에 지배당하는 소외는 전도된 표상(Vorstellung)으로 나타난다. 한 명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삼성’이라는 기업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한 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삼성의 노동자’이다. 나아가 그의 노동은 노동을 행한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월급과 연봉이라는 표상을 요구한다. 최근 유행하는 “88만원 세대”라는 표상은 바로 이런 전도를 가리킨다. 작품이 발표된 1818년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러한 삶은 갈수록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창조자의 이름이 그 창조물로 전도되고, 나아가 그 문학 텍스트의 저자가 잊혀져 온 과정은 바로 이런 소외와 전도의 역사 속에서이다.

물론 자신이 만든 대상을 끔찍한 공포의 존재로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이전에도 흔한 테마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역설적인 운명을 겪은 텍스트는 흔치 않다. 더욱이 그러한 전도가 작가가 아닌 대중과 대중문화에 의해, 즉 작품의 소비와 전유를 통해 이뤄져 왔다는 사실은 텍스트 그 이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경고: 이 글을 쓴 저는 문학이 전공도 아니고 평론가는 더욱 아닙니다. 생각나는 대로 내쳐 쓴 글이니 함부로 퍼가시면 곤란합니다. 하다못해 댓글이라고 적으시면 모르겠습니만…]

 

 

본 글은 SF 팟캐스트 구성원인 김국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IT이야기]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소고

0. 들어가며

 

팟캐스트에서도 자주 언급 했듯이, 요즘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일찍이 맑스   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전 유럽을 떠돌고 있다”라고 말한 것 처럼, “4차 산업혁명”이란 유령이 떠돌고 있는 셈.

그때와 다른 점은, “모든 자본가”들과 “언론”, “수많은 사짜”들이 신성동맹을 맺었다는 점만 다르달까?  이들은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신세계를 꿈꾸고, 이를 열광적으로 전파한다.

01. 유사한 데자뷰

웹이 새로운 대세로 자리잡은 2000년대 이후 이와 유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중반은 웹2.0이란 이념의 시대였다.  기술적 기반과 함께 상황은 급변했고 기술 에반젤리스트는 열광했다. 시멘틱 웹이니 RIA니 하는 기술적 발전은 이들의 열광의 근거가 되었다. 브라우저에서 작동하나, 마치 어플리케이션과 같이 복잡한 동작과 사용성을 커버하는 기술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웹 어플리케이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웹 서비스가 어플리케이션과 유사한, 아니 동일한 사용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은 이른바 PC 어플리케이션의 종말을 의미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네이버 독점의 시대를 끝장낼 수 있는 비장의 무기”쯤으로 보여지면서, 사람들은 전복의 쾌감에 열광했다.

수많은 사짜(이른바 사기꾼 지식인) 강연, 혹은 누군가는 지식의 보따리 장수로서 이 새로운 시대의 사상과 변화를 열광적으로 전파했고, 흡사 이들의 광신적인 사명감과 말빨은 모두에게 어슴프레 밝아오는 저 빛이 새시대의 이정표임을  기대하게 했다.

참여와 공유의 기본정신 아래, 자신의 정보를 아낌없이 공개하고, 이를 통해 사용성과 서비스의 질이 성공의 공식이 되는 신세계는 많은 IT 종사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할까?

그러나 남은 것은 무엇인가 냉정히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의 웹앱이란 용어, 그리고 블로그와 같이 쉽게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개인저작과 SNS와 같은 지식공유의 기재들 이들이 품은 함의는 “모든 지식을 공유하고 확산 할수 있는 rich internet platform”의 전망이 일궈놓은 땀의 결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희망찬 목소리로 외치던 신세계는 오지 않았다. 체제는 전복되지 않았다.

02. 인공지능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지금의 인공지능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의 열풍을 생각한다.

딥러닝을 한 의료진단 인공지능의 진단 정확도는 사람의 그것을 넘어섰으며, 바둑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거쳐 과거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정석”을 부정하고 있다. 블리자드는 최근 게임 API를 공개하며,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주요 player들이 내놓은 인공지능 라이브러리들은 두 손의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 많고, 각자의 헤게모니를 쟁탈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선형대수학과 통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간단한 프로그래밍 지식만 있으면 마치 누구나 인공지능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이분야는 공부하는 사람들은 Mnist의 학습을 통해 손글씨 숫자를 인식하는 로직에 경악한다. 블럭깨기를 학습을 통해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능숙하게 해 가는 과정을 보며, 사람들은 직감한다. 이들이 나보다 더 나아질 날 이 올 것이다.

반면 냉정하게 이야기 해 보면,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릴 만큼 혁명적인 변화가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전복의 쾌감과 미지에 대한 동경으로 이렇듯 열광하고 있구나.

03. 현시창, 그러나 변화는 온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손글씨 인식, 패션 Mnist를 통해 사진의 옷과 유사한 옷들을 자동으로 추천할 수 있다는 실현의 쾌감은 곧 새로운 절망감으로 이어진다. 결국, 데이터의 양이 모든걸 좌우하며, 그 방대한 데이터의 양을 커버하는 조직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것.

내가 만든 로직이 어떠한 내부로직으로 돌아가는 지 모르고, 그냥 API에 데이터를 던지고 결과값을 리턴받는다. 또한, 로직이 아닌 학습은 데이터의 양과 학습의 빈도에 따라, 개발자의 예상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복의 쾌감과 무지 혹은 미지에 대한 공포를 라벨링하면 그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당장의 혁명적인 변화가 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내 폰의 앱들이 내가 좋아하는 컨텐츠들을 알아서 가져다 줄것이다. 그리고, 내가 상담하는 상담원이 로봇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 지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05. 세상은 쉽게 뒤집히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신성동맹은, 사짜들이 Case를 과장하고 언론들이 실적과 홍보가 필요한 기업에게 success case를 확대 재생산 하는 방법으로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기에 자본가들은 기꺼이 돈을 댄다.

웹 2.0이 html5기반의 웹 어플리케이션 서비스, 그리고 자유롭게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저작의 도구, SNS서비스를 남겼듯이 지금의 열풍이 남기는 “자산”이 있을 것이라 본다.

다만 달콤한 전망에 입맛 다시다가는 씁쓸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로직을 구현하긴 쉬우나 상용서비스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험난한 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가 클 수록 현실은 시궁창이 될 것이다.

결국 전복의 기대는 배신당할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노동할 것이다.

다만 작금의 열풍이 어떤 자산을 남길 것인지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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